구름이 피어나는 소리

에이코믹스 유럽만화학교 연재 후기 본문

어제까지의 세계/A Comics 리뷰

에이코믹스 유럽만화학교 연재 후기

우엉군 2015. 3. 25. 10:42

 

  

'건축물'로 새로운 시공간을 창조하는 만화가 '프랑소아 스퀴턴 Francois Schuiten'

 

 

1년 전을 생각합니다. 틈틈이 훔쳐 보던 에이코믹스에서 객원기자 모집공고가 올라왔었습니다. 아마도 근무시간에 처음 봤던 걸로 기억합니다. 퇴근길에도 집에 와서도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가만히 묻고 물었습니다. 할 수 있을까. 해도 되는걸까. 그렇게 그 날 밤을 보낼 무렵 '밑져야 본전'이라며 단숨에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썼습니다. 비즈니스 이력서만 쓰다가 만화계 이력서를 쓰려니 무척 어색하면서도 재밌었던 기억이 납니다. 자기소개서도 거의 단숨에 휘리릭 써내려 갔죠. 한밤의 연애편지는 보내는게 아니라지만 모든 짝사랑이 그렇듯 오늘밤이 아니면 보내지 못할 것 같아 크게 심호흡하고 메일 '전송'을 눌렀습니다. 모든 건 아내도 모르게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작년 3월 23일, 처음으로 첫 리뷰를 작성했습니다. 리뷰 작품은 지미 볼리외의 <센티멘탈 포르노그래피>. 전 이 만화에 참 많은 빚을 졌습니다. 두번째 만화 작업을 할 때는 스타일을 훔치려 했고, 에이코믹스 첫 리뷰로는 이야기와 연출을 훔치려 했죠. 그렇게 어줍잖은 리뷰 기행이 시작됐습니다. 작년말 '2014 올해의 만화'를 정리할 때 언급했지만 에이코믹스 객원기자로 활동하며 무려 30편의 리뷰를 작성했습니다. 초심은 단순했습니다. 가능한 폭넓게 다양한 만화를 본다. 일본만화는 질리게 봤으니 저 편의 월드만화 100편 본다는 각오로 시작했습니다. 만화가 지망생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도 "당분간은 (만화) 보기만 하려고"라고 할 정도였으니... 허세였죠. 솔직히 말하면 그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말입니다. ㅎㅎ

 

한 바퀴 돌아 23일로 정확히 1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때 마침 미국을 끝으로 한 '유럽만화학교' 기획 연재가 종료되었습니다. 집에서는 작은 파티도 열었죠. 4부작 연재는 감히 생각도 못 했던 영역이었습니다. 에이코믹스의 스페셜 코너들은 현업 전문가들의 깊은 식견과 생생한 증언으로 꾸려지는 공간이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밤 에이코믹스 수석에디터님과 초기 아이디어 이메일을 주고 받다가 덜컥 받아버리고 만 것이었습니다.(폭탄 돌리기였을까요...) 시작은 역시 단순했습니다. 파리 샤를리 엡도 Charlie Hebdo 테러 이후 전세계 만화계가 이어가는 추모 만평 행렬에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에너지를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묵직했고, 거대했고, 생각보다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미쳐 몰랐던 주변부의 중심을 재발견한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유럽만화학교'라는 충동적인 호기심을 던졌고, 수석에디터님은 그걸 제대로 받아 치신거죠.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샤를리 엡도 테러에 대한 만평을 표지로 장식한 The Economist (2015.01.10)

 

3개월의 작업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조리 리서치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나마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주요 만화학교들에 대한 수석에디터님의 길잡이가 있었기에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앙굴렘에 만화학교가 있을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지금이야 모두 끝났으니 후기를 작성하고 있지만 리서치 초기만해도 절망적이었습니다. 국영문자료들을 도저히 구할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앙굴렘 유럽고등이미지학교(EESI)는 논문 등 일부 글이 있었지만 생-뤽 고등미술학교(Institut Saint-Luc)는 깜깜했습니다. 최대 장벽은 프랑스어였죠. 홈페이지에서 기초 자료를 확보해야하는데 이놈의 프랑스 학교들은 영어 서비스가 없는 겁니다. (이놈의 존심들...) 구글 번역기가 없었다면 번역비만 끙끙거리다 프로젝트는 시동도 못 걸었을 겁니다. 이 자리를 빌어 구글번역기를 만들어주신 구글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드립니다.

 

유럽만화학교 리서치를 하며 국내외 만화 글쓰기가 얼마나 풍부하게 진행되고 있는지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국문 글은 디지털만화규장각의 도움이 컸습니다. 2000년대 초부터 유럽, 일본, 미국 등 세계 만화산업의 변화에 대한 자료가 축적되어 있어서 분위기나 흐름을 캐치하는데 무척 유용했습니다. 영문으로는 SVA의 제시카 아벨(Jessica Abel)의 블로그 'Drawing WORDS & WRITING Pictures'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핀란드만화센터 초청으로 진행된 만화 교수법 교류행사를 스케치한 Finland Report 시리즈는 정말 현장에서 청강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생생했습니다. 생-뤽(벨기에), SVA(미국), 북유럽, 독일 등 국가별 만화학교 스타일의 차이점이 눈에 잡히는 듯 했습니다. 이 밖에도 모든 자료를 활용할 수는 없었지만 괴테인스티튜트(독일)와 핀란드만화소사이어티(핀란드)를 통해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만화산업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들이 국가의 의지와 에너지를 여실하게 느껴졌습니다.

 

리서치에 살을 붙이는 작업은 우리만화연대의 도움이 컸습니다. 처음엔 깨닫지 못했는데 저도 만화 과정을 수료했었더군요. 우리만화연대에서 진행했던 단편만화과정(2012)과 출판만화과정(2013-2014)의 경험은 유럽만화학교의 교과과정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드로잉, 연출, 스토리텔링이라는 기본 뼈대 위에 무엇이 더 심화되고 그 밖에 무엇이 보완되는지를 살펴보았죠. 그 가운데 핀란드만화센터(핀란드), 만화연구센터(미국)의 활동을 보며 우리만화연대의 강의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가를 새삼 실감했습니다. 뿐만아니라 디지털이든 인쇄물이든 독자에게 읽히는 최종형태인 '출판'의 중요성도 크게 공감이 되었습니다. (우리만화연대 포에버!)

 

'유럽만화학교' 연재를 통해 한 주머니 두둑히 챙긴 것은 뭐니뭐니해도 '작가들'입니다. 만화학교 교과과정이야 다들 비슷비슷하지만 동문의 면면은 확실히 달랐죠. 동문 이름을 하나하나 검색하며 작품을 살피다가 어느 컷에서 눈이 딱 멈출 때, 그 순간의 희열은 말도 못합니다. 정말 보석을 발견한 기쁨에 휩싸이죠. 제 위시리스트에는 프랑소아 스퀴턴 Francois Schuiten, 프랑크 페 Frank Pe, 마르틴 톰 디크 Martin Tom Dieck, 아센 Aseyn, 토마 카덴 Thomas Cadene, 조 쿠버트 Joe Kubert 등이 새로 추가되었습니다. 연재가 끝나자마자 프랑소아 스퀴턴의 '어둠의 도시들' 시리즈 중 <사라진 국경선>을 질렀죠. (절판되어 중고로 ;;) 국내 출판사에서 번역해주신다면 베스트이겠지만 해석불가한 외국어일지라도 이들의 작품을 하나하나 사 모을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배 부릅니다.

 

정말이지 멋진 만화의 향연이었습니다. 다음엔 또 어떤 리뷰를 이어가게 될까요? 그건 알 수 없지만 지금은 마치 만화세계일주라도 다녀온 듯한 여행자의 기분입니다. 이제 다시 편안히 앉아 만화를 하나하나 들여다 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즐겁네요. 열심히 그릴 수 없다면, 열심히 쓰기라도 하겠습니다. 만화 관계자분들 모두 화이팅입니다!!! 우엉우엉

  

 

 

 

 

동물과 자연으로 넘치는 생명력을 표현하는 만화가 '프랑크 페 Frank Pe'

 

 

 

함축과 은유로 실존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만화가 '마르틴 톰 디크 Martin Tom Dieck'

 

 

 

과감하고 도발적인 선을 구사하는 만화가 '아센 Aseyn'

 

 

 

 

[에이코믹스 유럽만화학교 기획 연재]

SPECIAL. 만화의 새로운 지위를 모색하다 : 유럽의 만화 학교 #00
SPECIAL. 유럽의 만화 학교 #01 프랑스 : 앙굴렘 유럽고등이미지학교(EESI)
SPECIAL. 유럽의 만화 학교 #02 벨기에 : 생-뤽 고등미술학교
SPECIAL. 유럽의 만화학교 #03 스위스 – 핀란드 – 독일
SPECIAL. 유럽의 만화학교 #04 유럽만화의 대칭점 ‘미국’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