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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46. 던전밥 - 마물, 너무나 맛있는 것 본문

어제까지의 세계/A Comics 리뷰

리뷰 #46. 던전밥 - 마물, 너무나 맛있는 것

우엉군 2016. 6. 17. 09:23

 

3월 휴간에 들어간 에이코믹스가 결국 사라졌다. "서버에 연결할 수 없습니다."라는 메시지로 보건대 최소한의 사이트 유지관리조차 이어가지 않기로 한듯. 내부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 많은 이들이 참여했던 2년간의 기록이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니 안타까움을 넘어 화가 날 지경이다. 김한민의 <혜성을 닮은 방>의 무이처럼 내가 좋아하는 공간은 모두 사라지고 마는 그런 느낌이다. 에이코믹스에 머물렀던, 이제는 수취인 불명의 지난 리뷰들을 하나씩 다시 기록한다. 마지막 리뷰라 너무나 애틋했던 던전시트콤 <던전밥>으로 시작한다.  우엉우엉

 

 

 

 

 

던전밥 (2권)

쿠이 료코 Ryoko Kui, 소미미디어, 2016, 각 7,000원

 

 

여자가 이슬만 먹고 살 수 없듯, 모험자들도 경험치만 먹고 살 수 없다. 모험자 일행 네 명이 일주일간 던전에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자. 무기와 포션 등 전투 도구는 준비물의 극히 일부. 배낭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바로 식량! 음료가 추가되면 그 무게는 가늠할 수도 없다. 적과 싸울 때 배낭을 내려놓을 수도 없는 노릇. 최악의 경우 던전 최하층에서 끝판 왕을 물리쳐도 햇빛과 영양부족으로 탈출에 실패한다면? 상상만해도 소름 돋는다. 밥이야말로 곧 모험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던전밥』이 판타지에 던지는 원초적인 질문이다.

 

던전 마물 퇴치로 생계를 꾸려가는 라이코스 일행은 한마디로 자급자족형 모험자 집단이다. 레드 드래곤에게 먹힌 여동생을 소화되기 전에 구하기 위해 다시 던전 최하층으로 향하지만 이미 돈은 바닥 난지 오래. 필수 식량조차 조달할 길이 없는 일행은 궁리 끝에 결국 마물을 잡아 먹기로 한다. ‘어쩔 수 없이’라고 동료를 설득하는 라이코스지만 마물 요리는 그의 오랜 염원이기도 했다. 이미 그의 품 안에는 마물 도감을 빙자한 마물 요리책이 쓰윽. (여동생은 이미 소화됐을 거라는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

 

일행은 셋으로 출발한다. 인간족 전사 라이코스, 엘프족 마법사 마르실, 하프족 도둑 칠책.  칠책은 숨겨진 함정을 피하고, 마르실이 마물과의 거리를 벌리고, 라이코스는 마지막으로(?) 벤다. 식비조차 없는 소규모 파티로서는 최적의 팀구성인 셈. 하지만 역시 마물을 먹는다는 건 용기만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조리법은 둘째 치고, 과연 먹어도 되는지가 판단불가. 모든 게 복불복인 상황에서 기적처럼 던전 생활자인 드워프족 워리어 센시와 만난다.

 

 

 

“마물이 적은 장소를 지난다고? 그럼 식재료를 확보할 수 없잖나.” - 센시 (앞줄 왼쪽)

 

 

센시와의 만남 이후는 모든 게 일사천리. 더 이상 마물을 피해 다니지도 않는다. 식자재 확보를 위해서 정면돌파. 센시는 젊은 모험자들의 불균형한 식단을 한탄할 정도니 말 다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맛과 영양. 심지어 아무리 위급해도 해독초를 요리해서 먹는다. 날 것으로 먹는 거보다 더 맛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털복숭이 드워프족이지만 센시의 손길은 섬세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의 마물 요리 철학은 가히 예술의 경지. 무엇보다도 그로 인해 슬라임과 같은 마물 하나하나가 맛과 향을 가진 완벽한 피조물로 재탄생하게 된다. 2권에서는 드워프족 센시의 던전 생태계에 대한 철학이 폭발한다. 에피소드는 ‘골렘밭’. 골렘밭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직접 보셔야 한다고 밖에는 답변드릴 수가 없다. 센시의 영향력이 커질 수록 엘프족 마르실과의 긴장도 격화되고 그 가운데 엉뚱하게도 하프족 칠책의 나이가 공개된다. 이게 『던전밥』의 묘미.

 

에피소드가 거듭될수록 만화가 쿠이 료코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 놀랄 뿐이다. 매번 놀라는 자신이 놀라울 정도로. 아마도 그의 하루 일과는 한 쪽 벽에 걸린 던전 지도를 바라보며 각 층을 배회하는 마물들의 피부 질감이나 맛을 상상하는 걸로 시작할지도 모른다. 요리 부위가 떠오르는 순간 적의 급소를 발견한 마냥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지고 침샘 분비가 시작되겠지. 그런 그를 생각하면 다소 변태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엄청 행복해 보인다. 어쩌면 이미 레드 드래곤에 대한 요리법이 코스 요리로까지 나왔을지도 모른다.

 

『던전밥』은 현실 세계에도 의미심장한 인사이트를 제공한다. 마물 요리라는 ‘부업’이 던전 모험이라는 ‘본업’을 어떻게 지탱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풋내기 마물 요리 연구가인 라이코스가 미식가이자 요리사로서의 센시의 위치보다 더 중요하다. 마물이란 장애물을 식자재로 바라보고 상상하고 탐구할 수 있는 그의 자세는 ‘어떤 식자재로도 요리할 수 있다면, 어떤 곳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듯 하다. 그곳이 던전이건, 한국이건. 그래도 결국은 던전 시트콤. 라이코스 일행과 함께 울고 웃다 보면 현실은 커녕, 여동생을 구한다는 비장한 목적조차 잊을 지경이다. 이제 의미 없이 무한 복제되어온 가짜 판타지는 던져버리고 오감만족 진국 판타지를 영접하러 가자!

 

 

 

“한 때는 그렇게나 무서워했던 대상이... 이렇게 약하고 맛있는 마물이었다니.” - 라이코스

 

 

 

그래도 역시 던전밥은 마르실!!

 

 

 

2016.03.03 리뷰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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