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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명상 속에 머무르십시오" - 글렌 굴드

우엉군 2015. 8. 13. 17:30

 

저같은 클래식 문외한도 '글렌 굴드'라는 이름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미지로서의 글렌 굴드왠지 나르시스적이며 아슬아슬하게 위험하고 괴짜스러운 비운의 천재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음악에 대해선 알 턱이 없었죠. 그러다 우연히 미셸 슈나이더의  글렌 굴드 전기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를 만나게 됐고, 책을 통해 음악가가 추구하는 경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곳은 영화 <마지막 4중주>보다도 더 고독하고 시끄러운 세계인 것 같더군요. 하지만 그 고독의 세계가 싫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금은 부러웠다면 이상한 걸까요.

 

20세기 위대한 천재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인 글렌 굴드(Glenn Herbert Gould, 1932~1982)는 30세에 돌연 연주회 은퇴를 선언합니다. 명상에 이르는 도구로 연주를 했던 그는 청중에 둘러 쌓여서는 이를 실현할 수 없다는 최종 판단을 내립니다. 하지만 연주회에 오르지 않는다고 음악 활동을 중단한 것은 아닙니다. 굴드는 자신의 음악을 계속 나누고 싶었고 이에 가장 효율적인 매개체로 방송을 채택합니다. 당시 발전하기 시작한 녹음/방송기술이 그의 의지를 구현한 셈이었죠. 피아노와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던 그는 악기에 매몰되지 않고 이를 최소화한 세계에서 음악을 구현하려 했습니다. 여전히 그 세계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미셸 슈나이더의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는 글렌 굴드의 길을 그가 사랑했던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의 구조에 비추어 하나하나 풀어나갑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전기가 또 있을까요. 시작합니다.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우엉우엉.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Glenn Gould, piano solo

- 미셸 슈나이더 Michel Schneider, 1988, 2002, 동문선, 이창실 -

 

 

여러 다른 피아니스트처럼 그 역시 이 손들을 마치 몸에서 분리된 이해할 수 없는 무엇처럼 바라보았다. 손은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피아노에 속해 있었다. 그가 건반 위로 쓰러질 듯 몸을 숙인 모습을 보면, 그는 마치 자신과 음악 사이에 더 이상 피아노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며 피아노 속에 자신을 지우고 융해시켜 버리려는 것 같다. '피아노 앞에 앉은 글렌 굴드'가 아니고,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인 것이다. p.76

 

 

 

 

1955.1.11. 저녁, 뉴욕에서의 데뷔는 타운 홀에서 있었다. 이 피아니스트의 출현을 두고 <뉴욕 타임스>는 "굴드 씨의 연주의 가장 뚜렷한 특성은 우리를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상태에 둔다는 점이다"라는 비평을 썼다. <뮤지컬 쿠리에>의 비평은 그를 "다른 세계에 대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다"고 묘사했다. 이튿날 그는 콜롬비아 레코드사와 처음으로 음반 녹음 계약을 맺고 평생 80장이 넘는 음반을 녹음하게 된다. p.43

 

그가 연주회를 반대한 궁극적인 이유는 정신적인 차원에 있었다. "음악은 청중을, 또 연주자를 명상으로 인도해야 한다. 하지만 2천99명의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명상에 잠길 수는 없는 법이다." p.49

 

 

  

 

불가사의한 소재에 대한 명료한 지식, 이것이 굴드의 연주의 초점이다. 듣기보다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 자신의 몸의 지체들을 분리시키고, 자신을 몸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음악가의 시도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시도다. 그렇지만 굴드는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나는 연주를 하는 것이 내 손가락이 아니라고 느낄 필요가 있다. 이 손가락들은 일정한 순간에 나와 접촉하고 있는, 그저 독립된 연장물들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온전히 전념해 있으면서도 나 자신과 거리를 두는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고. 그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접근의 직접성에 놀라게 된다. 마치 손가락들이 건반을 건드리지 않고 음악을 건드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p.101

 

그는 상상의 음질을 원했으며, 존재하지 않는 음을 찾곤 했다. 잃어버린 음이 아니라, 부재하는 음을. 그래서 심지어는 음악과 음, 이상과 피아노를 서로 배제시키기에 이르렀다. "음악에 대한 초월적 촉감의 경험과 전진의 개념이 있어야 한다. 피아노가 연주하는 것이 음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내 자신의 경우엔 이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대부분의 시간을 피아노와 떨어져 지내는 것이다. ... 완벽한 분석은 피아노와 거리를 둠으로써만 가능하다." p.123

 

 

 

 

굴드가 바흐를 좋안한 이유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바흐는 건반악기를 초월하고, 어떤 악기로도 연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음악은 악기를 부정해야 하고, 신을 섬기는 자가 신에게 초연하듯이 악기에 무관심해야 하는 것이다. 피크를 마찰시키고, 망치를 두드리고, 바람을 불어넣어 음관이 열리는 데서 음이 생겨난다고 해도 음악은 다른 곳에 존재한다. p.125

 

<골트베르크 변주곡 Goldberg Variation>의 악보에 의하면 30개의 변주 다음에 처음 연주한 아리아를 그대로 반복해서 연주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마지막 아리아가 처음 것과 다르게 들리는 것은 둘 사이를 가르고 있는 30개의 변주 때문이다. p.178

 

 

 

 

굴드는 예술가의 의무 사항의 중심에 '소멸감'을 두었다. 예술은 늘 덧없는 무엇이 될 수 있으며, 작품은 곧 꺼지고 마는 무엇이다. 그의 연주들은 종종 음악이 막 형성되어서는 조만간 사라져 버릴 것처럼 들린다. 그것들은 처음이자 마지막 말 같은 느낌을 주며, 그들의 황홀한 긴장은 정점 위에서 존재와 비존재를 가르는 아슬아슬한 균형으로 이루어진다. p.157

 

그는 늘 층을 이룬 조직과 소리의 깊이들을 좋아하게 된다. 소리에 전경이 허락되고 그 뒤의 다른 소리들이 작아지면서 사라지지 않는다면, 한순간 소리 하나하나가 차폐물이 된다. 대위법은 굴드가 고수하는 '거리감'을 위한 탁월한 영역이다. 음악은 항상 또다른 음악을 은폐한다. 푸가는 엄격한 법칙들로 반복을 이루어나감으로써 반복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자, 하나의 속임수이다. 그것은 상실이다. p.163

 

 

 

 

겨울, 지속되는 밤. 그는 햇빛을 싫어해서, 자신의 아파트 덧창을 완전히 내리고 잠을 자곤 했다. 그는 토론토에서 살았다. 토론토는 밤과 익명의 도시였으며, 거기서는 한층 씁쓸하게 고독의 열매들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수 개월 동안 그의 곁에 있는 것이라곤 전화 벨과 동시 녹음 조작대가 전부였다. 그의 피아노도 있었지만, 늘 있는 것은 아니었다. p.131

 

 

 

"혼자 있으십시오. 은총이라고 할 만한 명상 속에 머무르십시오."

- 글렌 굴드 (1964.11.11) -

 

 

 

 

* Reference
Glenn Gould - On the Record (NFB): 다큐멘터리 영상. 콜롬비아 레코드에서의 당시 녹음 모습들
Glenn Gould - Off the Record (NFB): 다큐멘터리 영상. 토론토 자택 등 일상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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