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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스의 조직체는 조직화된 기억체이다." - 한나 아렌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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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스의 조직체는 조직화된 기억체이다." - 한나 아렌트

우엉군 2014. 11. 17. 09:30

 

 

현대 정치사상 거장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1906-1975, 독일출생 유태계 미국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ichmann in Jerusalem, 1963>의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으로 유명세를 얻었지만, 앞서 출간된 <인간의 조건 The Human Condition, 1958>이야말로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통찰과 지혜가 가득 담겨있습니다. 노동과 작얼을 구분해낸 그녀의 날카로운 집도는 노동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오늘날 우리가 처한 곤경과 그 근원을 파헤칩니다.

 

아렌트는 '노동'에서 출발합니다. 그녀가 바라보는 '노동'은 생존의 긴박성과 필연성에 갇혀 오히려 초라해 보일 지경입니다. 그런 평가가 노동하는 모든 사람을 평가절하하고 무기력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적나라함이 그녀가 '노동'의 다음 단계인 '작업'과 '행위'로 나아가는 당위와 힘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노동이 생존을 위한 긴박성이라면, 작업은 세계를 유지하는 지속성의 원천입니다. 최근 한국에도 제작문화의 미풍이 불고 있습니다. 한국과 같은 터프한 노동사회에서 저녁이 있는 삶이란 극히 예외적이고 사치스럽지만 청년들은 제작과 놀이를 버무리며 일상이 되어버린 '비정상'에 일침을 가하고 있습니다. 보고서가 아닌 의자와 그릇을 만드는 작업들은 결국 아렌트가 말한 최후의 작업인, '예술가'의 영역입니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 사물을 통해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인의 존재. 하지만 그 작업인들조차 노동으로 편입되고 있는 실태. 아렌트는 그 현상을 놓치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의 통찰은 현재와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할 수 박에 없습니다.

 

 

문제는 제레미 리프킨도 지적했듯이 '노동'이 점점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대체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아렌트로 돌아오면 인간은 삶이라는 생존의 긴박성조차 해결할 수 없는 극한의 환경으로 내몰리고 있는 셈입니다. '작업'을 거쳐 '행위'로 나아가는 것은 둘째치고 제대로 된 '노동'에 머무를 수 있는 기회조차 없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작업'을 거치지 않고 '노동'에서 바로 '행위'로 나아가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 증거들은 거리 곳곳에 있습니다. 비단 해직노동자, 비정규직, 갑을관계만이 아니더라도 세월호 유가족, 인권침해 고발자, 1인 시위자 등 다양한 소수 목소리들이 점차 거리를 채워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시민들이 '완전한 정지'를 자처하며 우리에게 깊은 진지한 '사유(행위)'를 권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들의 옆에 서는 것만으로도 진리에 다다를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섬처럼 시간이 정지된 점들이 늘어납니다. 한 점 한 점이 각기 다른 세계를 품고 있습니다. 아렌트의 '노동-작업-행위'는 사적 영역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회의 표준화도 명백히 거부합니다. 그녀는 공적 영역이 사적 영역과 대등히 성장하고 기능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무엇보다 '타인'이 중요합니다.

 

'타인'은 인간이 사적 영역에서 가정을 통해 사적 소유를 완성하고, 정치적 조직체의 구성원으로 준비될 수 있도록 하며 사회가 표준화에 갇히지 않고 다양성과 객관성을 포용하도록 하며, 무엇보다 죄를 용서하고 서로를 해방시키며 함께 새로운 위대한 실험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노동도, 작업도, 행위도 결국은 모두 '내'가 아닌 '너'에게 이르는 길인 것입니다. 아렌트 누님의 세계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우엉우엉

 

 

 

- <인간의 조건> 췌 -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1958, 1996, 한길사, 이진우/태정호

 

 

#2장. 공론 영역과 사적 영역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사회가 모든 발전 단계에서 - 예전에는 가정과 가계가 그랬던 것처럼 - 행위의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사회는 각 구성원으로부터 일정의 행동을 기대하며, 숨낳은 다양한 규칙들을 부과한다. 이것들 모두는 구성원을 '표준화'시켜 행동하도록 하는 경향성을 가지며 자발적인 행위나 탁월한 업적을 갖지 못하게 한다. 루소의 도움으로 우리는 상류사회가 이러한 요구를 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들의 관습은 개인을 언제나 사회구조 내의 그들의 지위와 동일시한다. p.93

 

본래 '박탈된'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사적인'이라는 용어는 공론 영역의 이러한 다양한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 완전히 사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은 우선 진정한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이 박탈되었음을 의미한다. 타인이 보고 들음으로써 생기는 현실성의 박탈, 공동의 사물세계의 중재를 통해 타인과 관계를 맺거나 분리됨으로써 형성되는 타인과의 '객관적' 관계의 박탈, 삶 그 자체보다 더 영속적인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의 박탈, 사적 생활의 이러한 박탈성은 타인의 부재에 기인한다. p.112

 

 

#3장. 노  동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며, 수고를 한 시간만큼 수고의 결과도 빨리 소비된다는 것이 노동의 특징이다. 그리고 이런 수고는 그 무상성에도 불구하고 더할 수 박에 없는 긴박성에서 태어났으며, 삶 자체가 그것에 달려 있기 때문에 어떤 다른 것보다 강력한 힘에 의해 동기유발된다. p.142

 

영속성, 안정성, 지속성이라는 세계의 제작자인 제작인 homo faber의 이상은 노동하는 동물 animal laborans의 이상인 풍요함을 위해서 희생되었다. 우리는 노동자의 사회에 살고 있다. 왜냐하면 노동에 내재하는 무상함에도 불구하고 노동만이 우리를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다. p.183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을 한다. 이것이 (근대)사회가 내린 판결문이다. 그리고 특별히 사회에 도전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의 수는 급격히 감소하였다. 사회가 인정하는 유일한 예외는 예술가이다. 엄격히 말해서 이들은 노동하는 사회에 남겨진 유일한 '작업인'이다. p.183

 

소비자 또는 노동자의 사회에서 삶이 쉬우면 쉬울수록, 이 사회적 삶을 더미는 필연성의 충동을 계속해서 의식하기란 더욱 어려워진다. 더구나 필연성의 외적 현상인 고통과 수고가 전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더욱 더 그렇다. 이러한 사회의 위험은, 이 사회가 증가하는 다산성의 풍요에 현혹되고 끝없는 과정의 원만한 기능에 사로잡혀 더 이상 자신의 무상함, 즉 '노동을 한 후에도 지속되는 어떤 영속적 주체에서도 삶은 자신을 고정시켜 주체화할 수 없다'는 무상함을 인식할 수 없다는 데 있다. p.192

 

 

#4장. 작  업

 

사물들에게 그것을 생산하고 사용하는 인간으로부터의 상대적 독자성과 '객관성'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 지속성이다. 이 객관성으로 인하여 사물들은 적어도 잠시동안은 생산자이자 사용자인 인간의 탐욕스런 욕구와 필요에 '저항하여' 지속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세계의 사물은 인간의 삶을 안정화시키는 기능을 하며, 이 사물들의 객관성은 항상 변화하는 본질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같은 의자와 같은 탁자에 관계하믕로써 자신의 동일성을, 즉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 사람과 자연 사이에 세계가 없다면, 영원한 운동만이 존재하고 어떤 객관성도 있을 수 없다. p.194

 

집중적 비난의 대상이었던 모든 사물의 평가절하, 즉 모든 내재적 가치의 상실은 사물들이 가치 또는 상품으로 변형됨으러써 시작된다. 이 순간부터 사물들은 대신 획득될 수도 있는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서만 존재한다. ...... 화폐는 다양한 사물의 공통분모로 기능함으로써 사물들이 서로 교환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측정하고자 하는 사물과 자신들을 다루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잣대나 다른 모든 척도들이 소유하는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실존을 결코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p.225

 

 

 

#5. 행  위

 

폴리스의 형식에서 함께하는 인간의 삶(공동존재)은 가장 무상한 인간활동인 행위와 말 그리고 가장 덧없는 인위적 '생산물'인 행위와 이야기들을 사라지지 않도록 보증해준다. 물리적으로는 도시를 둘러싼 성벽이 보호하고 인상학적으로는 법률이 보중해주는 폴리스의 조직체는 일종의 조직화된 기억체이다. 이것은 가멸적 행위자의 지나가버리는 실존과 유동적인 위대성이 결코 현실성을 상실하지 않도록 보증해준다. p.260

 

행위는 오직 위대성의 기준으로만 판단할 수 있다. 왜냐하면 행위는 본질상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것을 파기하여 예외적인 것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그리고 일상에서 참인 것은 무엇이나 이것에 적용되지 안흔ㄴ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고유하기 sui generis 때문이다. p.268

 

인간은 매일 죄를 범할 수 있으며, 관계의 그물망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려고 하는 한 항상 '죄'를 짓기 마련이다. 따라서 죄는 항상 용서하여 잊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인간이 알지 못하고 행한 것으로부터 부단히 인간을 해방시켜야만 인간의 삶은 계속 가능할 수 있다. 인간이 행한 것으로부터 서로를 해방시켜줌으로써만 인간은 자유로운 주체로 남을 수 있다. 그리고 자기의 마음을 변화시켜 다시 시작하겠다는 부단한 의지를 통해서만 인간은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위대한 힘을 부여받을 수 있다. p.305

 

 

#6장. 활동적 삶과 근대

 

전통적으로 사유는 진리의 관조에 이르는 가장 직접적이고 중요한 길로 생각되었다. 플라톤 이래 그리고 아마 소크라테스 이후로 사유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말하는 내적인 대화로 이해되었다. 이 내면적 대화가 비록 외적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으며 심지어 모든 다른 활동을 오나전히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할지라도, 이 대화는 그 자체 고도의 능동적 상태로 구성되어 있다. 이 대화의 외적 비능동성은 완전한 정지인 수동성과 분명히 구별되는 것으로서 진리가 마침내 인간에게 계시되는 완전한 정지이다. p.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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