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피어나는 소리

"소설과 현실, 그 중간"을 찾아서 - 소설가 한강 본문

어제까지의 세계/낯선 시간

"소설과 현실, 그 중간"을 찾아서 - 소설가 한강

우엉군 2012. 3. 4. 23:58

 

자신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글은 좀처럼 나아가지 않는 법인가 봅니다. 오늘은 모든 것의 시작에 대해 짧게 끄적일까 합니다.

 

 

 

1.

작년 말, 문득 30대의 제 자신이 몹시 슬펐습니다. 수많은 질문 끝에 얻은 직업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부모님도 건강하신데... 알 수 없는 근원적인 슬픔 같은게 썰물처럼 밀려왔습니다. 그 슬픔이 제게 이렇게 묻는거 같았습니다.

 

"너를 설레이게 하는 건 뭐니?"
"......"

 

아주 곤란한 질문이었습니다. 30대는 '독립'에 올인하겠다고 다짐했던 제 자신이 카운터펀치를 먹은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대답할 수 없었던 자신이 서글펐습니다. 당시 제게 작은 즐거움이 있었다면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The Alchemist>를 필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요일 카페에 앉아 카푸치노 한 잔에 <연금술사>를 필사하고 있노라면 자신이 주인공 산티아고가 되어 여행하는 기분도 들고, 스스로가 코엘료가 되어 글을 쓰는 착각도 들었습니다.

 

그 때 우연히 '다섯 번째 의무 fifth obligation' 구절을 만났습니다. '모든 무슬림은 일생에 한번 성지 순례를 떠나야 한다'. 부러웠습니다. 좋던 나쁘던 인생이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 때, 성지를 향해 새롭게 순례를 떠나는 그 마음이 말입니다. 그 마음은 얼마나 맑고 투명하고 가벼울까요. 하얀 햇살, 상아색 벽담, 파란 지붕과 하늘. 튀니지의 시디 부 사이드, 인도의 이름 모를 어느 이슬람 사원이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지 순례를 떠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수 주에서 수 개월에 걸쳐 순례를 떠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어떤 사명의 완수' 또는 '자유의 조건 완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 말이 길었습니다. 요는, 삶이 서글픈 30대 남자가 <연금술사>의 다섯 번째 의무 '순례 pilgrimage'를 만나고 '자유의 조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2.

작년 12월, 우연히 한강 작가를 만나게 됐습니다. 논현문화정보마당에서 개최된 '우리문학콘서트'에서 <희랍어 시간>의 저자로 한강 작가와의 자리를 마련한 덕분이었습니다. 음악 연주, 애독자 낭독, 작가 낭독 모두 좋았지만, 단연 으뜸은 작가와의 Q&A 시간. 질문은 3개 한정이었지만 무례를 무릅쓰고 한강 작가께 질문을 드렸습니다. "(작가님을) 자유롭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요?"라고. 지금 생각해도 바보 같은 그 질문에 한강 작가는 따스하고도 멋스럽게 답변해 주었습니다.

 

" 제가 자유를 느낄 때는
소설을 쓰다 잠깐 쉴 때에요.
먹기도 하지만 '걸어요'
걸으면 자연인이 되는 것 같아요.
소설과 현실 사이를 걸을 때
소설과 현실의 중간 정도에 있을 때
그 때 자유를 느껴요.
감각적이죠. 추상적이고.
그러다 소설로 다시 들어가기 직전
그 때 큰 기쁨을 느껴요.
소설이 끝나면 힘들어요.
그래서 또다시 소설을 준비하죠."

 

덕분에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자유란 녀석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어떤 대칭점 사이에서 숨쉬는 녀석이라는 것을요.

 

 

소설가 한강

 

 

 

3.

그렇게 2012년을 맞이했습니다. 구정 즈음이었을까요? 스승님을 만났는데 아니나 다를까 똑 같은 질문을 하시더군요.

 

"네가 가장 즐거울 때는 언제니?"
"낯선 시간, 낯선 장소, 낯선 만남이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 자신에게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저의 대칭점은 불러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두 번째 블로그 <구름이 피어나는 소리>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구름이 피어나는 소리>는 저를 설레게 하는 대칭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대칭점들 사이에는 시끌시끌한 제 업에 대한 이야기도, 좀더 명확해져 갈 자유의 조건들도 기록해 나갈 예정입니다. 그것이 어떤 이야기들로 엮어지건 블로그를 마칠 때쯤 멋진 나만의 지도를 갖기를 바랍니다. 그 지도를 손에 들고 '순례'를 떠날 수 있다면 정말 멋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엉우엉

 

 

세상이 본래 지니고 있는 생명의 힘이 힘차게 뿜어져 나오는 지도를 함께 그릴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런 지도가 새겨놓은 길을 거쳐 커피가 내게로 온다면 무척이나 설레겠다. 그러는 순간, 한 잔의 커피는 진정한 이국의 묘약이 될 것이다.

- <자유인의 풍경> 김민웅, 한길사, p.23

 

 

 


튀니지, 시디 부 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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