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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의 세계/낯선 만남

세계 지도를 만든 사람들

우엉군 2014. 5. 1. 23:05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Honil Gangni Yeokdae Gukdo Ji Do, 1402)
조선 건국 직후(태종 2년) 제작된 세계 지도로 한중일은 물론 아프리카까지 담고 있다. 위치나 축적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15세기말까지 제작된 유럽의 어떤 지도보다 우수하는 평가를 받는다. 현존하는 2점의 사본은 모두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미지의 세계를 만나는 첫 번째 창은 '지도'다. 지금이야 손 안에 위성지도를 들고 다니는 멋 없는 시대가 됐지만,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시절, 그러니까 위대한 모험가들이 탄생했던 시절의 지도는 그 자체가 정보, 과학, 종교, 예술의 집합체였다.

 

그런 지도를 보면 나도 상상한다. 죽을 때 내 인생을 하나의 지도로 남길 수 있을까하고. 만약 내 아이들이 한 장의 지도를 통해 내 삶을 꿰뚫고 시행착오를 줄여 미지의 영역으로 더 일찍 과감하게 떠날 수 있다면... 나도 내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ㅎ

 

여기, 사나이들이 뜨거운 심장을 걸었던 오래된 한 장의 초대장이 있다. 오직 나침반과 밤하늘의 별에 의지해 걸어 나간 모험가와 지도 제작자들의 이야기로 가득한. 죽기 전에 세계 여행을 꿈꾸는 분들을 위해 발 로스 Val Ross의 저서 <지도를 만든 사람들 The Road to There> (2007, 아침이슬, 홍영분)을 소개한다. 부디 일상에 무뎌진 심장에 오대양 바람을 불어 넣을 수 있기를! 우엉우엉.

 

 

 

 

Al-Idrisi's Tabula Rogeriana (1154)
시칠리아 왕국에 18년간 머무르며 로제르 왕을 위해 알 이드리시가 제작한 세계 지도. 이후 300년간 가장 정교한 세계지도로 평가받는다.

 

1145년 시칠리아왕국, 기독교인 왕(로제르 왕)과 그의 친구인 모슬렘 학자(알 이드리시)의 사이가 얼마나 도타웠는지 왕이 비밀리에 이슬람교로 개종했다는 소문이 떠돌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의 우정이 그토록 진실하고 견고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로제르 왕이 세운 원대한 계획, 즉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정확한 세계 지도를 만들겠다는 꿈을 두 사람이 함께 이루어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름다운 광채를 발하는 은 바탕에 전 세계 대륙의 해안과 섬의 윤곽을 새겨 넣을 예정이었다. p.28 (중세 세계를 그린 로제르 2세와 알 이드리시)

 

 

 

중국 명나라 세계 지도 (1418)
성차승람(The Marvellous Visions of the Star Raft)에 수록된 명나라 세계 지도. 콜럼버스에 앞서 정화가 아메리카 대륙을 먼저 발견했다는 주장을 뒷받침 한다. 정화는 1405년부터 1435년까지 함대를 이끌고 대원정에 나섰다.

 

1405년 명나라, 새롭게 뱃길을 여는 일이 중요한 만큼 영락제는 함대를 지휘하는 자리에 적임자를 임명해야 했다. 당시는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유교 사장에 젖어 윗사람을 공경하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도록 애쓰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억제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던 때였다. 이에 반해 정화는 모슬렘으로 그의 종교는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알라신의 교리를 전파하도록 가르쳤다. 이미 수세기 전부터 중국에서는 모슬렘들이 페르시아나 아랍과의 교역을 전담해 오던 터였다. p.40 (정화의 남해원정)

 

 

 

Fra Mauro world map (1459)
포르투갈 아폰소 왕(엔리케의 맏조카)의 의뢰로 베네치아의 위대한 지도 제작자 프라 마우로가 제작한 세계 지도.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1444년 포르투갈, 엔리케 왕자는 후손을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선구자적인 면을 생각할 때 수많은 사람들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선박 건조자, 항해자, 지도 제작자들로 구성된 전문적인 해양 연구달을 최초로 조직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지도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일이며, 그것이 포르투갈의 다음 세대들을 '대항해 시대'로 이끌게 되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먼저 깨달은 사람이었다. p.66 (노예무역의 아버지 항해왕 엔리케)

 

 

 

Carte de France (1682)
가브리엘 드 라 히레가 그린 프랑스 지도. 성직자 장 피카르와 장 도미니크 카시니가 이끄는 과학자들이 정확하게 수정한 수치에 따라 그렸다.

 

1682년 프랑스, 유난히 콧날이 긴 왕(루이14세)의 얼굴이 일순간에 찌푸려지며 언짢음이 드러난다. 그동안 프랑스인들이 막연히 생각해 오던 것과는 달리, 과학자들이 새롭게 만든 지도에는 존엄한 왕의 영토인 프랑스가 대서양이나 지중해에 이르도록 널리 뻗쳐있지 않은 때문이다. 오히려 프랑스 영토는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 ... 하지만 도로나 운하를 건설해서 무역을 촉진하고, 그렇게 해서 부유해진 국민으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확한 지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아는 왕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른다. p.82 (대를 이어 지도를 만든 카시니 일가)

 

1789년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프랑스에는 도량형이 통일되지 않아 혼란이 극심했으므로 과학자들과 상인들 사이에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혁명에 성공한 국민 의회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표준'을 만들도록 위임하였따. 그것은 불변하는 자연의 어떤 요소를 기준으로 삼아 십진법으로 표시할 수 있어야 했다. ... 아카데미 측은 북극에서 적도까지의 거리의 천만 분의 일의 길이를 기준 단위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1791년, 카시니 4세의 지휘 아래 두 과학자가 투입되어 북극에서 적도까지의 길이를 측정하기 위한 삼각 측량이 시작되었다. p.91 (미터법)

 

 

 

1805년 독일, 훔볼트가 그린 에콰도르의 침보라소 화산의 단면도. 훔볼트는 산의 높이에 따라 자생하는 식물군이 달라지는 모습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나타냈다. p.122 (남미의 역사와 자연까지 그린 훔볼트)

 

 

1996년, 캐나나 대법원은 이야기와 노래로 전해 내려오는 구술 지도들도 유럽식 지도와 동일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다른 부족들도 '델가무우크 판례'에 힘입어 조상들의 땅을 되찾게 된 것이다. 그 한 예로 니스가 족은 브리티시 컬럼비아의 12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나스 강 계곡의 땅을 되찾았다. p.142 (등기 문서 역할을 한 북아메리카 지도)

 

 

 

존 머리 John Murray 경의 전 세계 대양 수심 지도 (1912)
영국 챌린저호의 역사적인 항해로부터 20년이 흐른 뒤 완성된 대양 수심 지도.존 머리 경은 챌린저호에서 조사한 내용뿐 아니라 다른 배들로부터도 정보를 수집해 지도를 완성했다.

 

1873년 9월 모나코 공국, 알베르 대공은 해류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히론델러라는 범선에 올랐다. 배가 아조레스 앞바다에 이르자 대공은 유리병과 맥주 통들을 바다로 던졌다. 병과 맥주 통 속에는 그것을 발견한 장소를 적어서 꼭 되돌려보내 달라는 글이 담겨 있었다. 알베르 대공은 몇 년에 걸쳐 총 1,700 여 개의 병을 영국과 캐나다 뉴퍼들랜드 인근 바다에 띄웠다. 되돌아온 병은 227개에 불과했지만 그 병들을 통해 북대서양 해류가 시계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p.145 (바다 속 지도를 만든 사람들)

 

  

 

* Reference
Early world maps:
http://en.wikipedia.org/wiki/Early_world_ma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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