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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카드도 되나요? - 쓰키지와 아키하바라의 다른 대답

우엉군 2016. 2. 11. 16:50

쓰키지 어시장 카페 '센리'의 커피+치즈케이크 세트, 600엔

 

 

 

"카도데 이이데스카? (カードでいいですか?, 카드도 되나요?)"

 

짧고 굵었던 2박3일 일본 도쿄 출장 내내 입에 달고 있었던 서바이벌 일본어였습니다. 현금이 곧 신용인 나라. 왠만한 주문은 입구 자판기에서 결재해야 먹을 수 있는 도시. 그런 나라에 법인카드를 들고 출장 놀이를 갔으니 시작부터가 완패였습니다. 그래서 여행기록 따위 남기지 않으려 했지만 쓰키지 어시장의 작은 카페가 계속 아른거려 글을 남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쓰키지는 안 되고, 아키하바라는 됩니다. 말장난 같은 이야기를 이제 시작합니다.

 

1월 출장 마지막 날, 숙소 거점이었던 도쿄 신바시(新橋, Shimbashi) 인근 지역을 돌았습니다. 구두를 신고 걸을 수 있는 반경은 쓰키지 어시장(築地漁市場, Tsukiji Market), 긴자(銀座, Ginza), 아키하바라(秋葉原, Akihabara) 정도였죠. 일본하면 스시, 도쿄하면 쓰키지 어시장!!! <스시 이코노미>를 읽은 후 줄곧 동경했던 쓰키지 어시장은 도쿄 방문 1순위였습니다. 하지만 론리플래닛 상의 정보와 달리 도매점은 오전 9시 이후에나 입장이 가능하더군요. 6시 50분쯤 도착했지만 볼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경매도 이전에 이미 종료된 듯했죠. 저희는 알콩달콩 모여있는 스시 가게들로 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다이와 스시(大和寿司)'를 비롯한 유명 스시 가게들은 줄이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마저도 신용카드로 먹을 수 있는 곳은 한 곳 정도. 입구 쪽에 카드 결재하고 먹을 수 있는 곳이 있었는데 그 맛은 기억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쓰키지 어시장이 아니더라도 방문 했던 어떤 음식점도 제대로 된 곳은 카드를 받지 않더군요. 일본에서 카드가 된다는 것은 '맛은 포기하고 배만 채워라'라는 뜻인가 봅니다. 실패한 우리는 대신 어시장 상인들이 출입하는 식당을 찾기로 했습니다. 다이와 스시 골목 입구에 '센리'라는 작은 카페가 있었고 그곳에서 희끗희끗한 상인들이 담배에 커피, 그리고 간단한 아침식사를 즐기고 있더군요. 저희는 그곳을 향했습니다. 담배를 피우며 수제 치즈케잌과 푸딩을 맛볼 수 있는 멋진 가게였죠. 커피와 치즈케이크 세트가 600엔 정도했습니다. 역시 카드는 받지 않았습니다.

 

 

쓰키지 어시장 스시 가게들 사이에 자리 잡은 카페들

 

 

 

10시, 긴자를 향했습니다. 긴자라면 카드를 받아 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오의 긴자는 전혀 감흥이 없었습니다. 서울에서도 가장 안가는 동네가 청담동과 명동이니 할 말 다했죠. 신세계 백화점의 모태였다고 하는 미츠코시 백화점을 방문. 마침 출장 기간 중 8층 면세점 오픈 이벤트가 있었지만 상상만큼 인파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윗층 이벤트홀에 발렌타인 데이 특별 패키지 배송을 위해 줄 섰던 인파가 더 볼만했죠. 귀국하니 일본도 중국 관광객을 겨냥해 도쿄 한복판에 면세점을 열였다는 경제지 기사가 있었는데 흥행 여부는 좀더 지켜봐야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카드 한번 못 긁고 긴자를 탈출했습니다.

 

 

미츠코시 백화점, 왼쪽 현수막이 27일 면세점 오픈을 알리는 대형 광고

 

 

 

아픈 발을 질질 끌고 찾은 아키하바라는 역시 진미 중의 진미였습니다. 제 피는 속일 수 없더군요. 첨단 전자제품의 거점으로서의 예전의 영광은 희미해졌지만 전세계의 덕후들의 성지로서의 기능은 여전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일본인 덕후 외에도 코스프레를 한 외국인 커플들이 종종 목격되었죠. 외관상으로는 비슷비슷한 건물들이었지만 수많은 덕후들이 향하는 곳은 단 한 곳, '라디오회관(Akihabara Radio Kaikan)'이었습니다.

 

라디오회관은 1962년에 오픈한 당대 일본 최고의 전자제품 메이커들의 쇼룸 기지역할을 수행했었다고 하는데요, 지금은 1층부터 8층까지 각 층을 일본 애니메이션 연관 산업들이 테마별로 입점해 있습니다. 카드, 피규어, 만화, K-Books, 애니 DVD, 일러스트, 프라모델, 밀리터리, 코스프레 등이 층층별로 포진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특히 3~4층의 만화 층 한 켠에 19금 섹션이 있는데 저로써는 동인지의 세계를 처음으로 목도한 거라 탄성밖에 나오지 않더군요. 그 진지한 표정들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님들 프라이버시 보호 차원에서 카메라는 오프. (근데 K-Books이 정확히 뭔가요? ;;)

 

 

새로운 전설을 만들어 가고 있는, 이어폰을 낀 덕후들을 후루룩 흡입한 라디오회관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카드'였습니다. 애니메이션 파생 산업 중에서도 카드는 굉장히 심오한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듯 했습니다. 보통 100엔, 200엔 하는 캐릭터 카드가 1천~2천엔까지도 왕왕 올라가 있었습니다. 레어 아이템이라 그런 듯.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니 1만엔(10만원)까지도 있었습니다. 러브라이브 캐릭터인듯 한데, 성우로 추정되는 분의 사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카드 콜렉션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층을 구분하지 않고 곳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신용)카드는 안 되지만 (캐릭터)카드는 되는 무서운 공간이었죠. 하여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데 일가견 있는 대단한 나라입니다.

 

 

무려 1만엔, 러브라이브 짱!!(좌),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서는 그랑블루 판타지 크로니클(우)

 

 

세가 스테이션 남자화장실의 흥미진진 소변 게임(좌), 아키하바라 맛집 '쇼와식당'(우)

 

 

 

도쿄 여행은 짧았습니다. 새로움보다도 오랜 친근함을 재확인하는 듯한 여행이었죠. 카드에서 시작해 카드로 끝난 기이한 여행이었지만, 도쿄 여행법은 문화생활에 있지 않나 짐작해봅니다. 아키하바라는 그저 '망가의 나라, 일본'의 상징적인 단면에 불과합니다. 자신만의 취미를 발전시켜가는 멋쟁이라면 도쿄는 그야말로 천국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도쿄를 기웃거리다보면 없던 취미도 생길 것 같더군요. 이러나 저러나 잊지마세요. 일본을 제대로 즐기려면 두둑한 현금이 필수라는 걸. 카드는 스미마셍. 우엉우엉

 

 

 

기차와 지하철 집적회로인 신바시역(좌), 창업 스토리를 만화로 제작해 비치한 아파 호텔(우)

 

 

신바시 야경, 퇴근길의 넉넉함과 아늑함이 있었던 역전 가게들

 

 

또 가고 싶은 쓰키지 어시장 카페 '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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