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피어나는 소리
[웹툰] 잠시나마, 섬이 다른 섬에게 - 송곳(2014) 본문
어차피 만나게 될 만화는 어떻게든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작년 주변에서 최규석 만화가의 <송곳>을 보라고 그렇게들 추천을 했는데 한 귀로 흘렸더랬죠. 봐야할 녀석들이 줄을 섰었거든요. 그런데 지난주에 시사인에서 웬 별책부록을 하나 보냈길래 익숙한 그림체가 있어 무심히 펼쳤더니... 프롤로그 하나로 그만 송곳의 마수에 걸려 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달렸네요.
송곳과 함께하는 '노동자 권리 찾기 가이드북' (시사IN 별책부록, 가치있는 건 항상 비매품)
솔직히, 옆구리 찌르는 만화 별로 달갑지 않습니다. 만화를 덮었을 때의 후유증이 꽤 버겁거든요. '나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지?'라는 아주 떨떠름한 찌꺼기는 그야말로 처치곤란입니다. 식혜 마시고 남은 밥건더기 같은... 그에 비해 <송곳>과 동류의 영화 <카트>는 좀더 깔끔했던 것 같습니다. 영화는 아무리 현실적이고 정교하다 하더라도 극장 밖 공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현실과 분리되는 안도감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웹툰은 영 그러지가 못합니다. 웹툰을 보는 곳이 방, 화장실, 지하철 등 모두 현실의 장소들이기 때문일까요? 웹툰의 인물과 사건은 바로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송곳>은 더 아팠습니다.
부진노동상담소장 구고신. 이 캐릭터가 없었다면 <송곳>도 없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회에서 이런 분을 만난 적은 없습니다만 최근 몇 년간 전쟁터에 있다는 느낌을 받은지라 구고신 소장의 일갈이 아주 맛깔났습니다. '싸움'에 대한 그의 표현은 정말 제대로더군요. 막상 당시에는 몰랐지만 돌아보니 가장 정확한 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밖에도 어른인 척 하지 말라는 말, 시시한 선과 시덥지 않은 악에 대한 이분법, 노조의 내부 갈등 등등이 모두 좋았습니다. 무리하지 않고 선을 긋는 명쾌함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노동문제가 좀더 거리감 있게 제대로 보였습니다.
이수인씨
싸움은 경계를 확인하는 거요.
어떤 놈은 한 대 치면 열대로 갚지만
어떤 놈은 놀라서 뒤로 빼.
찔러봐야 상대가 어떤 놈인지 알 거 아뇨.
...
싸우지 않으면 경계가 어딘지도 모르고
그걸 넘을 수도 없어요 .
10년을 일했지만 노동자라고 생각한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죠. 화이트건 블루건 결국은 다 노동자라는 걸. 외면했다고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송곳> 중간중간 의도적으로 심어 놓은 교육내용들은 이런 저를 꽤 자극했습니다. 특히 프랑스나 독일이 학창시절부터 조합이나 교섭에 대한 수업을 한다는 부분은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비정상회담> 다니엘이 말한 "독일인은 둘만 모이면 단체를 만든다"의 맥락이 이해가 되더군요.
<송곳> 4부가 시작됐습니다. 이야기는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까요? 꼭 한 번은 이기고 싶다는 황주임의 말처럼 한번의 작은 승리와 처절한 패배로 가게 될까요? 우리는 구고신 소장과 이수인 과장과 어디까지 함께 달릴 수 있을까요? 문득 이들의 싸움은 '아슬아슬하게 아웃'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 점이 아슬아슬한 세이프 보다 낫지 않을까요? 몇몇이 시스템 안에 남는 것보다, 외연을 넓히는 것이... 저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갑자기 만화 <멋진남자 김태랑>이 생각납니다. 구조조정에 맞서 전직원들을 퇴사시켜 종업원 지주사를 만들었던 그 스케일과 박력이 말이죠.
3부까지의 모든 대사 중에서 전 아래 대사가 단연 최고였습니다. 모든 섬들, 부디 사라지지 않고 함께 하시기를. 우엉우엉
섬에서 탈출하기 위한 첫번째 조건은
다른 섬의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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