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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피어나는 소리
요즘은 오로지 '삶'만을 생각하려 애씁니다. 더 나은 삶도 아닌, 더 멋진 삶도 아닌 오로지 '삶' 그 자체에 귀 기울이려 애씁니다. 하지만 좀처럼 삶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네요. 엠마뉘엘 르파주의 으로 체르노빌 30주년을 되새기고, 옥시 가습기 사건에 분노하고, 한강 누님의 맨부커상 수상에 환호하다가도, 미세먼지와 해운 산업의 구조조정으로 또다시 시계 제로... 이런저런 사건사고가 켜켜히 쌓여갈 수록 삶의 생생함은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도 비스와바 누님이 계셔서, 잠시나마 정신 차리고 하늘을 한번 올려봅니다. 그러면 시대를 관조하는 그녀의 시선이 시공간을 넘어 전해지는 듯 합니다. 비스와바 심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 1923-2012) 누님의 (2007, 문학과 지성사, ..
저같은 클래식 문외한도 '글렌 굴드'라는 이름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미지로서의 글렌 굴드는 왠지 나르시스적이며 아슬아슬하게 위험하고 괴짜스러운 비운의 천재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음악에 대해선 알 턱이 없었죠. 그러다 우연히 미셸 슈나이더의 글렌 굴드 전기 를 만나게 됐고, 책을 통해 음악가가 추구하는 경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곳은 영화 보다도 더 고독하고 시끄러운 세계인 것 같더군요. 하지만 그 고독의 세계가 싫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금은 부러웠다면 이상한 걸까요. 20세기 위대한 천재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인 글렌 굴드(Glenn Herbert Gould, 1932~1982)는 30세에 돌연 연주회 은퇴를 선언합니다. 명상에 이르는 도구로 연주를 했던 그는 청중에 둘러 쌓여서는 이..
지난 4월, 서울에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Karl Polanyi Institute Asia; KPIA)가 개소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1988년 캐나다 본부, 프랑스 유럽본부에 이은 세 번째 연구소이자 아시아본부라는 타이틀은 묘한 자부심마저 불러일으키더군요. 그 와중에 본부와 달리 '정치경제연구소'가 아닌 '사회경제연구소'로 명명한 부분 또한 재미있는 포인트였습니다. 소식과 함께 달려갔으나 업무시간 종료, 방문은 다음을 기약합니다. 경제사학자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와의 만남은 5년전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사회적 기업에 대한 관심을 구체적인 직업의 형태로 가져가기 위해 고민하고 있었고, 닥치는 대로 책을 파며 사람들을 만날 때였습니다. 그 때 흘러흘러 만나게 된 책이 칼 ..
김진혁 PD의 뉴스타파 추모영상 '너의 꿈을 비웃는 자는 애써 상대하지 마'를 보고 한번은 가수 신해철에 대한 기억을 정리해야겠다 생각했다. 차일피일 미루던 중 석정현 작가의 '굿모닝 얄리' 일러스트를 보게 됐고 나도 올해가 가기전에 나름의 인사를 건네야겠다 생각하게 됐다. 가수 신해철(1968~2014)은 내게 시인이었다. 그의 음악에 열광하진 않았지만, 그의 음악은 어떤 식으로든 내 삶에 영향을 미쳤다. 초기작들은 달콤하고 아름다워서 좋았고, 중기작들은 묵직한 관찰과 내지르는 일갈이 복잡한 세상을 깔끔하게 정리해주어 좋았다. 힘겨웠던 시절 나는 그의 고백과 분노에서 많은 격려와 폭발력을 얻었다. 2000년대 초 마왕이 MBC 라디오 을 진행했을 때에는 유언장을 작성하기도 했다. 어느 비오는 새벽, 그..
현대 정치사상 거장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1906-1975, 독일출생 유태계 미국인)는 의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으로 유명세를 얻었지만, 앞서 출간된 이야말로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통찰과 지혜가 가득 담겨있습니다. 노동과 작얼을 구분해낸 그녀의 날카로운 집도는 노동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오늘날 우리가 처한 곤경과 그 근원을 파헤칩니다. 아렌트는 '노동'에서 출발합니다. 그녀가 바라보는 '노동'은 생존의 긴박성과 필연성에 갇혀 오히려 초라해 보일 지경입니다. 그런 평가가 노동하는 모든 사람을 평가절하하고 무기력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적나라함이 그녀가 '노동'의 다음 단계인 '작업'과 '행위'로 나아가는 당위와 힘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노동이 생존을 위한 긴박성이..
건강검진차 머문 병원에서 9월호를 뒤적이다 멋진 예술가 한 분을 알게 됐다. 유네스코 UNESCO에서 동양인 최초로 도자기 전시회를 열었다는 신경균 도예가. 마치 숨은 보석이라도 찾아낸 듯 설레고 흥분되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관련 자료들을 후다닥 서치하다 신경균 도예가가 운영하는 '장인요'와 이번 전시회를 후원한 LH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속 어록을 아래에 옮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글이 최고. 최혜경 기자의 '파리에 뜬 달. 항아리'을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도예 작업에 대한 깊은 이해가 담긴 정말 아름다운 글이다. 우엉우엉 신경균 도예가의 '달항아리' A journey to Paris: Preparing Shin Gyung Kyun's exhibition "아버지가 도자기는 나의 종교이다라고 말..
2013년 12월 눈 내린 삼청동, 갤러리현대 아트큐브에서 최우람 작가의 키네틱 아트(Kinetic Art, 움직이는 예술)를 처음 만났다. 들어올테면 들어와보라는 각 잡힌 '램프샵' 입구에서 몇 번을 발걸음을 돌리다 마음 단단히 먹고 입장. 들어서니 과연 관객은 혼자 밖에 없었다. 사방은 깜깜했고 규칙적인 기계음이 들려왔다. 각자의 빛을 품은 기계생명체들이 제각각의 몸짓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말을 걸고 있었다. 그곳은 흡사 불운한 천재 과학자의 실험실 같았다. 솔직히 좀 무서웠다. 2층 계단 입구에 이 곳을 오르려면 맹약이라도 해야 할 것처럼 한 중년의 여자분이 앉아 있었다. 그 분이 입을 열었다. "사진 찍으셔도 되요. 작가분이 허락하셨어요... 작품 정말 좋죠?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에요. 원래 여..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 p.672 (에필로그) 며칠 전 우크라이나 시위대가 레닌 동상을 철거했다는 뉴스를 보며, 문득 마르크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Eric Hobsbawm이 생각났다. 모든 역사가 왕조와 통치자 중심으로 서술할 때, 역사의 관점을 아래인 민중에게로 돌려주었다는 평가를 받는 역사학자. 한 때 공산주의자였던, 끝까지 사회주의자로 남았던, 그래서 역사학의 논쟁에서 늘 대칭점을 제공했던 괴짜 에릭 홉스봄. 그의 자서전 (민음사, 2007) 중 일부를 적어둔다. 우엉우엉 #1. 유대인에 대한 입장 나는 조상들이 믿었던 종교의 관습을 지켜야 한다는 심정적 책임감을 느끼지 못한다. 한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에게 연대를 요구하는 작지만 호전적이고 무화적으로 낙후했으며 정치적으로 공격..
지난 일요일, 윗 동네 '환기미술관'에 다녀왔다. 한국 추상미술 대가이신 김환기 화백(Whanki Kim, 1913~1974)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지인들이 선생님의 작품은 환기미술관에서 보는게 제 맛이라고 세뇌를 시켜서 근 1년을 벼르다 가을 나들이를 청했다. 환기미술관은 형형색색의 단풍들로 둘러 쌓여 있었고, 곳곳에 꽃나무와 조소 작품들이 배치되어 마치 잘 정돈된 정원 같았다. 마치 프랑스의 유명 화가 미술관을 방문한 것처럼 입장료(1만원, 성인)가 전혀 아깝지 않았던 깊이 있는 시간이었다. 작품에 몰입할 수 있도록 설계된 우아하고 장엄한 미술관 실내 구조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훔치고 싶은 김환기 화백 작품과 글귀 일부를 추린다. 여담이지만 이미지를 모으는 과정에서 대표 작품들을 온라인에서 구할 ..
Tunesische Skizze (튀니스 스케치),1914 흑백과 단채색 작업을 고수했던 '파울 클레 Paul Klee'는 1914년 36살의 튀니지 여행을 통해 "나는 튀니지에서 모든 색을 얻었다"라고 선언한다. 이후 그의 작품은 전과는 전혀 다른 색들로 표현된다. 그런 파울 클레의 그림은 마치 초대장 같았고, 나는 그렇게 튀니지를 만났다. 언젠가는 파울 클레의 피라미드를 만나기를... 우엉우엉. "Color has taken possession of me; no longer do I have to chase after it, I know that it has hold of me forever. That is the significance of this blessed moment. Color and I..